2025년 4월 2일부터 4월 1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진행하는 국립극단의 <그의 어머니 Mother of Him>을 관람하고 왔다. 복잡한 전 문장에서 보이듯 ‘국립극장’과 ‘국립극단’의 공동주최 공연으로 진행하고 있다. 공연 러닝타임은 155분, 인터미션으로는 15분이 포함된 시간이다. 14세 이상 관람가로 일부 욕설이나 부분적인 신체 노출, 성범죄를 의미하는 단어 사용, 조명의 사용으로 인한 눈부심 등이 있었다. 필자는 국립극에서 기예매 후 4월 5일 토요일 15시에 공연을 관람했다. 예매는 2024년 말미 즈음에 공개되었는데, 그 당시 포스터와 연출, 원작자만 공개된 채 캐스팅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여, ‘아, 국립극단에서 이정도로 일찍 예매를 오픈하는 걸 보면 뭔가 큰 거 준비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일찍 예매했다. 캐스팅을 보고 나름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어 기뻤다.

어느 날과 다를 바 없었던 캐나다에서의 아침, 브렌다는 아침을 요리하면서도 쇼핑몰의 설계를 맡아 분주했다. 그럼에도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첫째인 매튜가 얼마 전 세 명의 여자를 강간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수없이 울리는 전화, 학교에 가야하는 아직 어린 둘째 제이슨, 집의 2층에서 가택연금 중인 10대, 첫째 매튜까지. 모든 것이 그녀를 흔들어 놓고 있다. 그녀는 첫째 아들 매튜가 성인 법정이 아닌 소년 법정에 설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들이지만, 아들은 변할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집 앞에 서있는 기자들 탓에 미칠 지경이다. 문만 열면 모두가 어머니인 브렌다를 주목한다. 며칠 뒤, 학교에 가기 싫다던 둘째 제이슨이 끝내 나이차가 별로 나지도 않는 형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그녀가 쥔 마지막 이성의 끈이 끊어지며 끝내 폭발한다.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이 상황. 끝내 ‘브렌다‘와 ’두 아들의 어머니‘라는 존재감, 혹은 역할 사이에서 어쩌면 여전히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제목처럼 온전히 어머니인 ‘브렌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이 사건의 원인으로 보이는 매튜가 세 여자를 강간했다는 점이 (사건에 있어) **온전하게 해결될 것이라는 편견(해결의 방향이 긍정적으로 풀리든, 아니든)**과 다르게 매튜의 범죄 사실은 적어도 변치 않으며, 오히려 심화된다. 이를 더 선명하게 강조하는 것은 ‘매튜’라는 인물의 기능, 한마디로 그 자체에 있다.

<그의 어머니> 포스터. 출처 : 국립극단

<그의 어머니> 포스터. 출처 : 국립극단

빙빙~ 돌아가는 회전 무대에요

이를 위해 무대를 먼저 설명하자면 무대 가운데는 회전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면은 부엌이고, 다른 한 면은 거실로 보인다. 두 공간 모두 가운데의 출입문(현관문)을 가지고 있고, 이 문을 열면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기다린다. 좁은 문을 통해 집중되는 라이트와 기자들의 이목은 마치 프로시니엄 무대의 효과와 비슷하게 작용하는 듯 했다. 주인공들에게 향하는 저널리즘의 압박감이 더 강렬하게 작용한다. 이러한 생생함은 관객에게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문 밖을 나가면 나를 향한 집중이 쏟아진다. ‘내 아들은 사진엔 없지만 나는 그의 어머니이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스테이지 라이트(객석의 시점으로는 무대 왼편)에는 2층의 매튜 방이 있고, 이는 고정형이다.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인물들의 동선으로 보아 계단의 중간 즈음에 화장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구조에 유선, 무선, 아들방 등 온 집안에서 울려대는 전화기가 그녀의 불안한 심리감을 그대로 묘사한다. 극의 후반으로 갈수록 정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집안의 모습을 통해 쉽게 투영된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미디어 파사드를 활용했다. 원작자인 에번 플레이시가 두 청년이 대학 캠퍼스에 난입해 벌어진 범죄 사실을 모티브로 이 작품을 썼던 걸 보아, 공연 중간중간, ‘장’으로 예상되는 사이사이에 비춰지는 실제 사진과 뉴스 자료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감을 높인다. 이 말도 안될 것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으며,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모습들을 극적으로 번갈아 비춤에 따라 극으로 하여금 더 극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장치가 될 것이다. 자료들과 더불어 무대 위 배우들을 카메라로 비추는 장면도 인상깊었다. 특히, 제이슨이 선물로 받은 카메라가 잠든 매튜의 얼굴에 집중되는, 일종의 클로즈업된 모습은 매튜의 일체(그의 외적인 모습과 범죄사실과 같은 은밀한 모습) 중 오직 ‘형’의 역할에 집중하는 듯하여, 순수한 제이슨의 이미지가 잘 그려진다.

브렌다, 숨 쉬세요! 아니, 그 전에 님들이 먼저 떠나줘야-

매튜는 극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방에 머문다. 가족간의 행사를 위해, 가끔 동생을 놀아주기 위해서, 혹은 때때로의 변호사와의 진술을 위해 잠시 1층으로 내려온다. 그 외는 방안에 어두커니 앉아있기도, 누워있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브렌다에게 주는 부담감처럼 작용한다. 집에 있는 아들. 괜스레 브렌다가 행동하는 데 있어 눈치를 보기도, 제약을 받기도 한다. 이 기본적인 압박감과 더불어 여러 인물이 등장함에 따라 단계단계 심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무대에서의 모든 행동의 원인이 매튜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맞다. 다만 이를 요즈음 언어로 ‘긁는‘ 것은 변호사 로버트, 여자친구 제시카, 전남편 스티븐이다. 변호사라는 사람은 돈을 주고 고용했음에도 마치 모든 것이 게임인 것 마냥 바라보는 듯하다. 매튜의 여자친구는 그와의 관계를 끝내지 못했고, 이제껏 무책임했던, 가정에 관심조차 없었던 전남편은 제이슨을 가져가려는 냥 군다(아이들 둘이 붙어 있게 키우고 싶지 않다며 제이슨을 고르는 장면은 관객들을 금세 브렌다의 편으로 만든다.). 정말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어머니인지, 아니면 브렌다인지. 끝내지 못한 관계들, 사랑하는 아들의 범죄, 자신의 일이 복잡하게 얽히며 관객들도 이야기가 진행할 수록 점점 벼랑 끝에 서는 브렌다를 지켜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이 여러 감정의 교차는 결국 클라이막스라고 부를 수 있는 장면에서 폭발한다. 샤워가운을 입은 채 등장한 브렌다는 매튜와 변호사의 조언 사이에서 가장 이성적이며 동시에 감정적인 상태로 돌입한다. ‘내 말대로 해야하는데, 내 말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녀는 좀처럼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무엇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한다. 위에서 언급한 온갖 감정들로 뒤덮인 채, **가장 이성적인 결정인 ‘포기’**를 선택한다. 문을 활짝 열고, 기자들 앞에서 샤워가운을 벗어 던지며 포즈를 취하는 브렌다. 그녀의 모습은 현대사회에서 가십거리를 좇는 언론사와, 매스 미디어를 떠올리게 했고, 특히 이를 위해 사생활을 파헤치며 n차 피해자를 만드는, 생명의 경계까지 위협하는 미디어의 추악함을 비추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가해자의 어머니인 그녀는 이제 또다른 피해자가 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해자를 옹호할 수도, 생각도 없다. 이를 위해 작가는 ‘그녀가 매튜를 위해 최선을 다했음- 전화를 받으며 일을 하고, 아이들의 밥과 옷을 챙겨주는 등‘,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만들고자 싱글맘, 워킹맘 등의 역할을 부여하고, 극 초반부에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을 삽입함으로써, 브렌다의 입장을 더욱 극적으로 전환한다. 이후 브렌다는 감정적- 이성적의 줄다리기에서 ‘이성’의 줄을 조금 더 당기는 모양새다. 이는 집으로 가정부(유모) 테스가 와서 집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장면을 통해 잘 표현된다. 테스는 브렌다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는 이상향적인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기댈 수 있는, 즉 이성적인 판단을 갖추게 하는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맡는다. 테스가 듣지 않지만 그녀에게, 혹은 브렌다 스스로에게 전하는 말 한마디가 그녀를 쓰러뜨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결국 이 난리통에서 브렌다는 이사를 가지 않고, 굳건하게 서있기로 결심한다.

김선영 배우의 차력쇼!… 맞나요?

온갖 홍보물에 김선영 배우를 내세우고 있어, 소제목처럼 김선영 배우의 차력쇼(?)를 예상했지만, 착각이었다. 모든 배우들의 연기력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극의 제목에 맞게 ‘어머니’를 내세운 홍보 방식이었을까 생각하다가도, 대체로 적절했다는 판단이 든다. 더불어 극의 제목이 단숨에 이해가 갈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하되, 내면을 갉아먹는 듯한 분위기의 극을 보여주는 것이 인상깊었다. 주인공은 주인공의 삶을 살면서도 두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 두 아이 중 한 아이가 위태로워지면서(물론, 가해자의 입장이 되었지만)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주인공 그 스스로의 입장에서 공격받는다. 두 입장차의 밸런스를 아슬아슬하게 맞춰가는, 시소와 같은 극을 만나 흥미로웠다. ‘빈틈없이 완벽했나?’에 대해서는 의문이 조금 있다. 일종의 사실주의 희곡보다 대사로의 표현에 있어, 전반적인 내용에 있어 조금씩 더 빈틈이 크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 점은 원작을 읽어보고 판단해야 할 문제같기도 하고, 관객마다 느끼는 점이 다를 것 같다는 판단이 있다. 오히려, 이러한 점이 브렌다의 깊은 고뇌감이 표현되는 것 같아 부정적인 비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희곡을 읽어보고 싶었지만 아쉽다. 이 외에도 유태인 가족의 설정을 위해 하누카의 기간을 삽입한 것도 인상깊다. 촛불을 하나씩 켜며 사건의 진행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것, 여덟개의 촛불을 끄고 켜는 작업이 이 짧은 축제 기간동안 벌어진 일이다며 극적인 현장을 강화한다.

큰 관련성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삶을 생각해본다. 우리 어머니는 어머니 역할에 얽매인 채 사는 걸까? 누군가를 크게 가해한 적은 없지만, 잔병치레가 많았던 그 앞날들을 떠올리며, 어머니의 헌신에 잠시 죄송하고도 감사함을 느낀다. 여성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해서도 의문이 여전히 있으나, 여성과 관련한 해석을 디테일하게 내놓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이를 반성하고 앞으로 젠더와 관련된 학문도 열심히 공부해야 겠다. 열린 결말로 끝내는 것도 좋았다. 그녀의 역할인 어머니는 끝나지 않는다. 아들이 감옥에 갈지, 집행유예를 받을지에 대한 닫힌 결론은 공개되지 않는다. 그 결과값에 따라 절연의 순간을 보인다던지, 아들을 감싸는 어머니의 역할을 갖는다던지 둥의 그녀의 행보도 따라서 보여주지 않는다.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날, 기자들이 정말 끈질기게도 눈을 맞으며 그녀와 아들을 기다리던 그 날. 그녀는 다만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어머지이자 브렌다인 그녀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것이다. 아마도 말이다.

아래에서 연극 ‘그의 어머니‘ 하이라이트를 감상할 수 있다.

https://youtu.be/DzgU710-xTE?si=jCJYcrYTKraBpoBE